한국 철강산업 발전사
개 요
철강산업은 자동차, 조선, 기계 등 타 산업과의 연관효과가 그 어느 산업보다 크고, 관련 산업의 경쟁력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등 경제적 파급효과 또한 지대하다는 점에서 산업의 쌀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발전을 이루려는 모든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발전시키려 했던 산업이나,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는 철강산업이 갖는 그 고유의 경제적, 기술적 특성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철강산업의 경제적 특성을 살펴보면 철강산업은 국내산업 중 산업 연쇄효과가 가장 큰 산업입니다. 대규모 장치산업으로서 생산규모가 커지면 고정비 분산효과, 생산 효율성 제고 등으로 생산원가가 하락하는 특성을 갖습니다. 또한 철강제품은 중량물로서 물류비용이 생산원가의 약 10% 내외를 차지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인프라 구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입니다.
기술적 특성을 살펴보면, 철강산업은 연속공정산업으로 다른 산업에 비해서 자동화기술이 공정 전반에 걸쳐 적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자 다량의 오염물질 배출 산업으로 에너지 절감기술과 환경오염 방지기술 등 핵심 공정기술의 확보가 산업 경쟁력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철강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는 물론 경쟁력 있는 최신 기술의 적기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철강산업의 발전은 속도, 규모, 내용 등 종합적인 측면에서 세계 철강산업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불과 수십 년 만인 2020년 현재 세계 철강생산 6위, 철강소비 5위, 수출 3위로 세계 철강산업을 선도하는 주도국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인당 철강소비는 1,130kg으로 세계 1위를 기록, 독일(500kg), 일본(493kg) 등 경쟁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자동차, 조선 등 철강소비산업의 수출경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철강산업과 철강수요산업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철강산업의 발전은 2차례의 오일쇼크,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심화,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수 많은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이룬 역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철강산업은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인 철강수요의 둔화, 이에 따른 과잉설비 심화 우려와 보호무역주의 확대,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규제의 강화 등 대내외적 위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에 우리 철강산업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왔던 과거의 발전 경험을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재도약의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철강산업의 발전단계를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도입단계는 1945년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국내 자본이 본격적으로 철강산업에 진입한 이후부터 1973년 포항제철소가 본격 가동되기 직전까지의 단계입니다. 도약기는 철강공업육성법을 중심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된 이후 1986년 철강공업육성법이 폐지되고 공업발전법으로 전환된 시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우리 철강산업의 성장기는 1986년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시점까지로 우리 철강수급이 안정적인 성장을 보인 시기이며, 마지막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반영된 2009년 이후 현재까지는 우리 철강수급이 전반적으로 정체를 보이는 시기로 4차 산업혁명 가속화, 환경규제 강화,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다양한 도전과 기회가 공존하는 시기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도입기 (1945년~1972년)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도입기는 근대적 철강설비가 도입된 이후부터 포항제철소 제1고로가 생산을 시작하기 직전까지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 철강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고려상사(현 고려제강), 대한중공업공사(현 현대제철), 동국제강, 동양석판공업(현 TCC스틸), 부산철관공업(현 세아제강) 등 주요 철강사들이 연이어 설립되었으며, 선재, 강관 등 소규모 압연설비 위주로 생산시설이 확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97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소 제1고로가 생산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철강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상·하공정간 불균형 또한 개선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철강시설은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 황해도에 설치된 겸이포제철소 입니다. 이후 일제는 철광석 수탈과 전쟁물자 보급을 위해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몇몇 철강시설들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의도는 한반도의 경제발전이나 지역 균형발전이 아닌 오직 자원수탈과 중일 전쟁 등의 군수지원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한반도의 철강산업은 지역적으로나 상·하공정 등 산업구조적으로 매우 불균형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철강산업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철강 상·하공정간 불균형, 즉 철강생산 프로세스가 최종제품까지 이르지 못하고 원료 또는 반제품의 생산단계에 머물렀다는 점, 둘째는 철강 생산을 담당하는 기술인력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기술전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철강 생산설비 대부분이 철광석 산지인 북한 지역에 편중되면서 남북 분단과 함께 남한에는 변변한 생산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점을 가진 우리 철강산업에서 한국이 주체가 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였습니다. 일제가 건설했던 남한의 일부 철강시설 마저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우리 정부와 철강인들은 경제발전의 핵심산업인 철강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의 전유물이었던 철강산업에 신생 최빈국이 도전한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무모하다고 인식되면서 1960년대 말까지 뚜렷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철강산업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해 1968년 포항제철(現 포스코) 주식회사를 창립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정부는 종합제철공장 건설 5개년 계획(1958) 등 일관제철소 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으나,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이 건설자금 및 기술 지원에 난색을 표하면서 번번이 실패한 바 있습니다. 당시 첨단기술의 일종인 일관제철공장을 최빈 개도국에서 건설한다는 것에 선진국들은 물론 국내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던 것은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당연한 결과였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 철강산업이 단기간에 고속 성장한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점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도입기 철강수급의 경우 광복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극도로 혼란했던 시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공급과 수요 모두 침체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53년부터 복구과정을 거치면서 제조업이 빠르게 성장하며 국내 철강수요 또한 급속히 증가하였지만, 당시 국내 철강산업은 철스크랩 수집이나 영세 주물업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철강제품을 수입에 의존하였습니다. 특히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국내 철강수요는 더욱 빠르게 증가한 반면, 이를 뒷받침할 국내 철강생산 시설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고, 철강무역수지 적자가 당시 전체 무역수지 적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1967년부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업, 수산업 등 1차 산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발전전략이 수정되면서 철강수요의 증가는 더욱 가속화된 반면,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강 공급능력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신증설된 설비 대부분이 소형 전기로와 단순 압연설비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수요 증가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적극적으로 철강 생산시설을 확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2년 2,500톤에 불과하던 선철 생산량은 1970년 48만톤으로 약 20배 증가했으며, 강괴 생산은 약 4배, 압연제품은 약 9배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내 철강공급은 수요에 크게 못 미치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제선, 제강 등 상공정과 압연, 도금 등의 하공정간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었고, 국내수요 증가로 생산량이 증가할수록 반제품 수입이 증가하는 불균형적인 구조가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대규모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상공정에 대한 투자가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 상하공정간 불균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으며,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으로 대규모 일관종합제철소 건설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과거 우리 정부는 1958년 `종합제철공장 건설 5개년 계획`을 통해 일관제철소 건설을 처음 추진하였으나, 당시 설비규모는 20만톤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외자 조달에도 실패하면서 건설이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 달성과 상·하공정간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관제철소 건설을 다시 추진되게 됩니다. 1966년 당시 철강선진국이었던 미국, 서독, 영국 등 4개국 8개사로 대한제철차관단(KISA: Korea Iron and Steel Association)이 결성되었으며, 이후 수차례 협의를 거쳐 기본협정을 체결하고 종합기술계획서(GEP: General Engineering Plan)까지 확정하였으나 미국 등에서 과다한 외채, 특혜를 받은 독점기업의 부실화 가능성, 설비규모 대비 국내 철강수요가 부족하다는 점 등 반대논리를 펼치며 차관 제공을 거부하면서 일관제철소 건설은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이 같은 반대논리는 당시 국내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얻었으나 정부는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다양한 경로로 일관제철 건설을 시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9년 12월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여 포항에 1단계 103만톤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1천만톤 규모로 확장하고, 적용 프로세스도 당시 최신 기술을 적용하는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을 확정하였습니다. 이는 과거 추진계획 대부분이 20~30만톤 규모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특히 초기 일관제철소 추진 시 논의되었던 소형고로-전기로제선, 평로제강 등 당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 또는 `오래된 기술` 대신 첨단 기술이었던 대형고로, LD전로 기반의 생산방식을 채택하면서 한국 철강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국가 차원의 대규모 투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내 철강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정부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정부의 의지가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 바로 철강공업육성법의 제정이었습니다. 1970년 발효된 철강공업육성법은 철강공업의 합리적인 육성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표로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한 장기저리의 외자도입, 원료구입, 기자재 공급, 항만/용수/전력/도로/철도 등 시설지원과 이와 관련된 공공요금의 파격적 할인혜택을 부여하고, 연구 및 기술개발 지원을 위한 경비 등을 국가가 지원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철강공업육성법은 1986년 공업발전법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우리 철강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일관제철소 건설과는 별개로 다수의 민간 철강사들이 설비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인 결과, 1960년대 초 설비당 2~3톤에 불과했던 제강능력은 15~20톤으로 확대되었으며, 형강, 철근, 선재, 후판, 냉연강판 등 다양한 압연업체들도 생산설비를 확충하면서 국내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만 일관제철소가 건설되기 전까지 국내 철강재 공급부족은 지속되었습니다.
도약기 (1973년~1985년)
개황(경제여건, 정책, 기업가정신 등)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도약기는 1973년 포항제철소 제1기 설비가 완공되면서 철강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때를 기점으로 1985년 철강공업육성법의 폐지로 정부주도의 철강산업 발전이 민간 주도로 전환되기 전까지의 시기입니다. 동 기간 중 우리나라 철강산업은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의 제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된 것을 시작으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국내 철강 경영인들의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 급속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한국이 극빈 개도국에서 세계 유수의 철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시기로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집약됩니다. 첫 번째 요인은 정부의 확고한 의지였으며 이러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 바로 철강공업육성법입니다. 당시 정부는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1970년 철강공업육성법을 제정,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요인은 불굴의 기업가정신과 근로자의 헌신이었습니다. 미국 등은 특정기업에 독점 특혜를 주는 것이 부패로 이어질 것이라 우려하였으나, 일관제철소 건설을 통해 국가발전을 이루려는 정부의 비전과 그에 호응한 경영인의 리더십, 근로자들의 헌신적 열정은 극빈 개도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일관제철소를 보유하게 되는 기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경쟁력을 갖춘 일관제철소가 건설되면서 당시 무역수지 적자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던 철강수입을 대체함은 물론 철강제품이 수출 주력품목으로 부상하면서 외화확보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나아가 우리 철강산업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자동차, 조선, 기계 등 연관산업의 발전을 지원하면서 우리 경제가 중화학공업 단계로 도약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도약기인 1973~1985년에는 철강수급 전반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수요, 생산, 수출 등 모든 지표가 큰 변화를 보였지만, 특히 가장 급격한 변화를 보인 것은 조강생산 이었습니다. 1972년 포항제철소 제1고로 가동 이전에는 61만톤에 불과했던 조강생산량은 1973년 124만톤, 1974년 227만톤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조강생산의 증가는 그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철강수요를 국내 생산으로 충족시켰으며, 철강수출 또한 크게 증가하며 만성적인 철강무역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키며 당시 국민경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73~1985년 당시의 철강수급을 부문별로 살펴보면, 수요의 경우 경제의 고속성장이 지속되면서 연평균 13.1% 증가했으나 생산은 연평균 15%로 보다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이는 포항제철을 중심으로 대규모 설비능력 확장에 따른 것인데 대규모 설비의 가동 직후 발생하는 잉여 생산량을 국제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로 소화함으로써 생산 증가율이 더 높았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는 국내 철강산업이 단순한 수입 대체를 넘어 수출 주력품목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같은 기간 철강수출은 연평균 17.1% 증가하였으며 수출국도 1985년 당시 철강선진국인 미국이 35%, 일본이 25%를 차지하는 등 우리 철강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반면 수입의 경우 국내수요가 급증함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2.9% 증가하는데 그치며 1962~1972년 중 철강수입이 연평균 26.2% 급증한 것과 큰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1985년 우리나라의 제선능력은 포항제철소의 910만톤, 제강능력은 전로 910만톤, 전기로 650만톤으로 총 1,560만 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선 및 제강설비의 집중적인 신증설로 우리나라 철강산업은 설비간의 불균형이 점차 해소되면서 안정적인 성장기반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1985년 우리나라의 조강생산은 1,354만톤으로 세계 15위, 철강수출은 660만톤으로 세계 9위로 부상하면서 세계 철강산업의 변방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철강산업은 불과 20여년 만에 세계 주요 철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당시 철강제품이 중화학공업 제품 중 최초로 수출 주력품목으로 성장한 것은 국가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선진국은 섬유, 의류 등 노동집약적 제품에 대해 무역장벽을 높여가는 가운데 후발 개도국들은 저임금을 바탕으로 당시 우리의 주력 수출품이었던 경공업제품 시장을 잠식하였으며, 당시 우리나라의 경공업 위주의 경제성장 및 수출전략이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선봉에 철강산업을 앞세웠으며, 우리 철강산업은 우수한 국제경쟁력을 바탕으로 당시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정부는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해 많은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일관제철소 건설이 비로소 시작하게 된 것은 일관제철소 건설이 처음 시도된 1958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70년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철강산업의 발전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요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당시 세계 철강산업은 순산소전로(LD전로), 고로대형화 기술, 연속주조기술 등 혁신기술의 상용화가 시도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서유럽 등 철강산업의 선발국들은 이러한 기술들의 가능성은 인정했으나 보다 안정적인 기존 기술을 유지한 반면 일본은 이들 혁신기술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경쟁우위를 확보하게 되는데 일본이 우리 철강산업의 협력파트너가 됨으로써 우리의 첫 일관제철소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혁신기술들이 고려된 설비구성을 갖추게 됩니다.
둘째, 포항제철소 2기가 착공되던 1973년에는 제1차 석유파동이 발발하면서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주는데, 특히 에너지 다소비 산업인 철강산업은 원가와 수요측면에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에 따라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철강업체들의 설비확장 사업이 크게 감소하면서 철강설비 엔지니어링 업체들도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위기는 대규모 철강설비 도입을 추진하고 있던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였고,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 혁신철강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일관제철소가 성공적으로 건설되는 한편으로 전기로 분야 또한 급속한 발전을 이룹니다. 당시 급증하는 건설용 강재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민간 철강업계를 중심으로 최신 전기로 설비가 속속 도입되면서 우리 철강산업의 상·하공정간 불균형 개선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1973년 5개 업체 43만톤에 불과하던 전기로 설비능력은 인천제철(現 현대제철), 동국제강, 강원산업, 한보철강 등에서 30~40톤 규모의 전기로를 설치하면서 1975년에는 14개 업체 650만톤으로 급증하게 됩니다. 특히,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60톤 전기로가 설치되면서 전기로 업종에도 최신 기술이 속속 도입하게 됩니다. 이로써 1985년 기준 우리나라조강설비능력은 1,560만톤(전로 제강 910만톤, 전기로 제강 650만톤)으로 불과 10여년 만에 철강 불모지에서 세계 유수의 철강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일관제철소가 성공적으로 건설되는 한편으로 전기로 분야 또한 급속한 발전을 이룹니다. 당시 급증하는 건설용 강재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민간 철강업계를 중심으로 최신 전기로 설비가 속속 도입되면서 우리 철강산업의 상하 공정간 설비간 불균형 개선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1973년 5개 업체 43만톤에 불과하던 전기로 설비능력이 인천제철(現 현대제철), 동국제강, 강원산업, 한보철강 등이 30~40톤 규모의 전기로를 설치하면서 1975년에는 14개 업체 650만톤으로 급증하게 됩니다. 특히,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60톤 전기로가 설치되면서 전기로 업종에도 최신 기술이 속속 도입하게 됩니다. 이로써 1985년 현재 우리나라는 전로 제강 910만톤, 전기로 제강 650만톤 등 전체 조강설비능력이 1,560만톤으로 불과 10여년 만에 철강 불모지에서 세계 유수의 철강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성장기 (1986년~2008년)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성장기는 그동안 국내 철강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주도했던 정부의 직접적인 시장개입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환되고, 철강수급도 전반적으로 안정적 성장 추세로 전환되기 시작한 시점인 1985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내외 철강수급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2009년 이전까지의 기간입니다. 과거 도약기에서는 국내 철강수요, 수출, 생산 등에서 두 자릿수의 급속한 양적 증가를 보였으나, 성장기에는 수입을 제외한 모든 철강지표가 한 자릿수의 안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동 시기 국내 철강수요의 안정적인 증가를 뒷받침하기 위해 광양에 제2의 일관제철소가 건설되었으며 보다 강화된 국제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을 더욱 확대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 등에서는 자국 철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규제를 더욱 강화하였고, 한국산 철강제품도 선진국의 수출자율구제(VRA) 등 각종 수입규제 대상에 포함되게 됩니다. 특히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철강산업은 도입기부터 정부의 강력한 정책지원과 제도적인 뒷받침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정부지원 문제가 주요 통상이슈로 부각되면서 산업정책 기조에 변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움직임과는 별개로 단기간의 급속한 양적성장을 넘어 철강산업의 구조를 보다 고도화하려는 움직임 또한 대두되게 됩니다.
이는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 온 개별산업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방식이 변화된 대내외 환경에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인식하에 개별 산업에 대한 직접지원 방식이 아닌 간접지원 방식으로 정책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86년에 철강공업육성법을 포함하여 각 산업별 육성법이 폐지되었고 기능별 간접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공업발전법이 제정되게 됩니다. 나아가 그동안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던 포스코의 민영화 문제가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단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2000년 9월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정부지분 4.6%까지 매각되면서 포항제철의 완전 민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줄기차게 제기되어 왔던 국내 철강산업에 대한 정부의 시장개입 의혹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내 철강시장은 경영 자율성이 한층 강화되는 한편 전기로를 중심으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업체 간 설비 신증설 경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IMF 외환위기를 맞게 됩니다. IMF의 영향이 본격화된 1998년 국내 철강수요는 35% 이상 급감하는 충격을 수출 확대를 통해 완화시켜 나가는 한편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가속화 되었습니다. 우리 철강산업은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였고, 당시 호황을 보이던 중국 철강시장을 적극 활용하며 IMF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중국 요인은 자국의 수요 증가를 훨씬 뛰어넘는 대규모 설비 증설을 추진하면서 2006년 이후 전세계 과잉설비 문제를 야기한 중국 리스크로 전환되게 됩니다.
국내 철강산업의 안정화된 성장기에서는 철강수급과 관련된 주요 지표들이 모두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철강소비의 경우 도약기에서는 연평균 13.3%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으나 성장기로 접어들면서 8% 수준으로 안정화되었으며, 수출 또한 17%에서 6% 수준으로 안정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생산도 도약기의 15%에서 6.7% 수준으로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수입의 경우 1990년대 중반 이후 냉연단압설비 등 하공정 설비의 신증설과 2000년대 국내 철강수급이 빠듯해지면서 도약기 단계에서 수입대체가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2.9% 수준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연평균 수입증가율이 성장기에는 11.8%로 급증하게 되면서 국내 수급의 잠재적인 불안정 요인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성장기 국내 철강수급 동향
수급 실적(천톤) | 주요 지표(%) | 연평균 증가율(%) | ||||||||
---|---|---|---|---|---|---|---|---|---|---|
내수 | 수출 | 생산 | 수입 | 수출/생산 | 수입/내수 | 내수 | 수출 | 생산 | 수입 | |
1986 | 1,093 | 576 | 1,548 | 247 | 37.2 | 22.6 | 7.9 | 6.0 | 6.7 | 11.8 |
2008 | 5,857 | 2,079 | 6,436 | 2,894 | 32.3 | 49.4 |
철강수급을 항복별로 보다 자세히 보면 철강재 생산과 소비는 1986년 1,548만 톤과 1,093만 톤에서 성숙기 마지막해인 2008년에는 각각 6,436만 톤과 5,857만 톤으로 각각 4.2배, 5.4배 증가하게 되며, 국내소비의 경우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게 됩니다. 수출의 경우 1986년에는 576만 톤에 불과했으나 2008년에는 3.6배 증가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2천만톤을 돌파하게 됩니다. 다만, 동 기간 중 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평균비중은 29%로 도약기 단계에서 40%를 넘었던 것에 비해 안정화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반면 수입의 경우 국내 철강생산 증가율이 철강수요 증가율에 못 미치면서 수급이 타이트해진 점과 냉연 및 강관용 원자재 수입수요가 증가하면서 1986년 247만 톤에 불과하던 철강재 수입이 2008년에는 2,894만 톤으로 11.7배 폭증하여 사상 최고치를 기록합니다. 1994년부터 10년 동안 철강수입관세가 단계적으로 인하되면서 2005년부터 완전 무세화된 것도 철강수입을 증가시킨 요인으로 분석됩니다. 이로써 내수에서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6년 22.6%였으나 2008년에는 49.4%에 달하면서 국내 철강산업의 지속가능 발전에 최대 위협요인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수요산업별 국내 철강소비 구조의 변화를 살펴보면, 공업화 초기인 1975년 전체 철강소비의 54% 내외를 건설부문이 차지하고 나머지 46%를 제조업이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산업화가 빠르게 진전되며 자동차, 조선, 기계 등 철강 다소비 산업은 지속 성장한 반면, 주택, SOC 등 인프라 구축이 마무리되면서 건설용 철강재의 수요는 둔화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2008년 기준 주요 수요산업별 소비비중을 보면 건설 28%, 자동차 25%, 조선 21%, 기타 26%로 건설, 자동차, 조선 등 3대 업종이 전체 철강재 소비의 73%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게 됩니다. 1985년 제1고로 건설을 시작으로 7년여에 걸쳐 고로 총 4기, 조강생산능력 1,170만톤의 단위 공장으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소를 완공하게 됩니다. 더욱이 광양제철소는 그동안 축적된 모든 역량을 집약하여 건설한 세계 최신예 제철소로서 일자형 공장 설계, 최신 설비 도입, 생산공정 전산화 등 당시 최고의 기술을 집약시켰으며, 과거 출선에서 열연제품 생산까지 4~5일이 걸렸던 것을 불과 4시간 30분으로 단축시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제철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910만톤 규모의 포항제철소 건설에 13년 이상 소요된 것에 비해 1,140만톤의 광양제철소 건설기간은 불과 7년여에 불과할 만큼 공기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켰으며, 이는 온전히 국제경쟁력 제고로 이어지며 포스코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사로 발돋움 하였습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소 건설로 2개 제철소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포항제철소는 수요자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는 다품종 소량의 고급강 및 고부가가치강을 중심으로, 광양제철소는 자동차강판을 중심으로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이원화 전략을 추구하면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경쟁우위를 확보하였습니다.
한편 전기로 부문에서는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으로부터 시작된 경기회복과 건설경기 활성화로 건설용 강재 수요가 급증하면서 설비의 신증설과 신기술 도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100~120톤 규모의 대형 전기로 도입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기술적으로도 편심노저출강 방식(EBT : Eccentric Bottom Tapping), 박슬래브주조법(Thin Slab Casting) 등 혁신기술이 속속 채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일관제철소 뿐 아니라 전기로부문에서도 활발한 설비 신증설이 이루어진 결과 2000년 우리나라 조강생산은 4,311만 톤으로 세계 6위의 철강생산국 지위를 굳건히 지키게 됩니다.
한편 전기로 부문에서는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으로부터 시작된 경기회복과 건설경기 활성화로 건설용 강재 수요가 급증하면서 설비의 신증설과 신기술 도입이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100~120톤 규모의 대형 전기로 도입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기술적으로도 편심노저출강 방식(EBT : Eccentric Bottom Tapping), 박슬래브주조법(Thin Slab Casting) 등 혁신기술이 속속 채택됩니다. 이와 같이 일관제철소 뿐 아니라 전기로부문에서도 활발한 설비 신증설이 이루어진 결과 2000년 우리나라 조강생산은 4,311만 톤으로 세계 6위의 철강생산국 지위를 굳건히 지키게 됩니다.
성숙기 (2009년~현재)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성숙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국내외 철강경영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2009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국내 철강소비는 2008년을 정점으로 다소간의 등락을 보이고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둔화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동차, 조선, 건설 등 국내 수요산업의 미래 성장잠재력이 크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철강수요 증가는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주요 산업별로 보면 자동차 산업은 내수가 정체된 상태에서 수출보다는 현지 생산전략을 강화함으로써 국내 생산 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선산업의 경우도 건조량이 2011년을 정점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으며, 최근의 극단적인 위축에서 회복된다 하더라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으로 회복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최대 수요산업인 건설업의 경우도 국내 인프라 구축 수요가 감소하고 주택경기도 위축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건설수주액, 건축허가면적 등 주요 지표도 하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국내 수요환경이 위축되는 가운데 수출환경도 악화되고 있습니다. 세계 철강수요는 중국 등 일부 개도국을 제외하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로 더욱 약화된 자국 철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세이프가드 등 수입규제조치를 강화하면서 우리 주력 수출제품 대부분이 수입규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내외 철강시장 여건이 위축되는 가운데 국내 철강생산은 오히려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인 2005년 현대제철이 일관제철업에 진출하면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고로 3기, 총 1,200만톤의 조강생산능력이 증가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포스코도 설비합리화 등을 통해 설비능력을 증강시키면서 우리나라 조강설비능력은 2008년 6,014만 톤에서 2014년 8,691만 톤으로 증가했다가 2019년 현재 7,835만 톤으로 다소 줄어든 상황입니다.
2000년대 들어 국내 철강재 생산은 꾸준히 늘어난 반면, 철강소비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감소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철강내수는 성장기인 1986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7.9%의 증가세를 보였으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2009년 4,541만 톤에서 2019년 5,323만 톤으로 연평균 증가율은 1.9%에 그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국내 소비가 정점을 기록한 2008년 5,857만톤과 비교할 경우 국내 철강소비는 오히려 0.9%씩 감소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철강수출은 국내 철강업계의 수출 확대 노력과 국제경쟁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증가하면서 국내 소비 위축에 따른 충격을 완화시켜 왔으나,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철강보호무역 조치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수출환경이 크게 악화되고 있습니다. 2009년 2,054만톤을 기록한 철강재 수출은 2019년 3,038만톤으로 연평균 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추세를 보면 2014년 3,226만톤으로 정점을 기록한 후 완만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국내 철강소비의 위축을 철강수출로 만회하고, 철강수입도 감소하면서 국내 철강재 생산은 2009년 5,692만톤에서 2019년 7,356만톤으로 연평균 2.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2017년 7,797만톤을 정점으로 연평균 2.3% 감소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철강수입은 2009년 2,048만톤에서 2019년 1,678만톤으로 연평균 2% 감소를 보였습니다.
한편 철강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36.1%에서 2019년 41.3%로 증가했으며, 수입산 철강제품이 국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3%에서 31.5%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철강 수출비중과 수입비중이 모두 높은 것은 우리 철강산업 특유 현상으로 최근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움직임과 국내 철강수요가 정체되는 상황에서는 지속되기 어려운 교역구조로 판단됩니다.
성숙기 국내 철강수급 동향
수급 실적(천톤) | 주요 지표(%) | 연평균 증가율(%) | ||||||||
---|---|---|---|---|---|---|---|---|---|---|
내수 | 수출 | 생산 | 수입 | 수출/생산 | 수입/내수 | 내수 | 수출 | 생산 | 수입 | |
2009 | 4,542 | 2,054 | 5,692 | 2,048 | 36.1 | 45.3 | 1.6 | 4.0 | 2.6 | △2.0 |
2019 | 5,323 | 3,038 | 7,356 | 1,678 | 41.3 | 31.5 |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철강산업이 성장해 온 역사는 세계 철강산업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관제철소 건설을 적극 추진했던 1960년대 말 철강 선진국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는 대규모 일관제철소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당시로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지적을 따랐다면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한 우리 철강산업이 가능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이는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우리 주력산업에도 적용되겠지만, 철강산업이 가장 먼저 성공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강력한 의지와 급격한 상황변화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려는 도전과 혁신이 우리 철강산업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철강산업은 국내외의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수요 둔화의 징후가 분명해지고 있으며, 해외 시장도 글로벌 철강설비과잉 문제가 재연되면서 수출여건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철강보호무역주의는 과잉설비라는 구조적 문제뿐만 아니라 미·중 패권경쟁까지 얽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철강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 해외 변수로 인한 영향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수출의 경우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제품군 및 시장을 고도화하고 수입도 적정 수준으로 조절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과정이 시장체제 내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국내 철강업계의 보다 세심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