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철기시대의 시작 (철기의 유입 및 확산)
비파형동검 (청동기)
철검 (초기 철기)
우리나라의 철기문화는 중국 전국시대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조도끼를 위시한 농공구류가 대량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철기문화가 본격적인 자체생산 및 원재료 수출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을 전후한 무렵으로 이때부터는 단조철기가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철기 생산의 본격화 및 현지화, 제조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사회통합이 가속화되어 최초의 고대국가인 위만조선이 등장하였습니다.
한반도 철기 문화의 시작과 전개는 당시 선진지역인 중국 동북지역의 우수한 철기 문화의 수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쇠화살촉 (낙랑)
쇠거울 (낙랑)
한반도 철기 문화의 시작과 전개는 당시 선진지역인 중국 동북지역의 우수한 철기 문화의 수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반도 내 초기의 유입상황은 중국 전국시대 중만기의 기술적 전통을 가진 철기 문화의 영향, 낙랑 성립 이후 한나라의 철기 문화 유입을 통한 발전, 그리고 고구려 철기 문화의 전파 등 크게 3차례의 큰 변화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철기가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역사적으로 고조선 시기에 해당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고조선은 동검문화가 발달한 청동기시대였으며, 이후 중국 동북지방으로부터 망명한 이주민인 위만집단에 의해 위만조선이 건국된 후 한반도의 대동강유역도 철기시대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후 위만조선은 동북아시아의 대표주자로서, 동아시아 여러 집단과 중국과의 교역을 독점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부를 축척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위협으로 인식한 한나라는 위만조선으로의 철기 수출을 제한 하였고, 대규모 전쟁을 일으켜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이후 위만조선의 영토에는 ‘낙랑’이 설치됩니다.
낙랑은 중국의 한 무제가 위만조선(기원전 108년)을 멸망시키고 그 영역 안에 설치한 한사군 중의 한 곳입니다. 낙랑은 한때 25개 현을 거느린 큰 세력을 형성했으나 중국 본토 내의 정치적 혼란과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이후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해짐에 따라 낙랑의 세력은 더욱 축소되었고, 마침내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당시 낙랑의 철기들은 모두 단조품으로, 낙랑을 통해 들어온 이러한 단조기술은 한반도 토착사회에 영향을 주었으며, 곧이어 단조철기의 보급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한반도에 보급된 철기문화는 이후 고대국가 시기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우게 됩니다.
철의왕국 가야
철기 조각
갑옷 (단갑, 短甲)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고조선 멸망 후 소부족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경 고구려를 시작으로 백제와 신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시점을 고대국가 형성의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한국사학계 일부에서는 삼국이 아닌 기존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야를 포함시킨 ‘사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가야는 낙동강 하류 유역에 있던 여섯 세력으로,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대가야, 성산가야의 6가야를 지칭합니다. 삼국과 달리 가야를 고대국가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삼국이 독립된 정치체계를 갖추었던 반면, 가야는 6개 지역의 세력이 연합한 연맹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가야는 고대 한반도에서 철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던 ‘철의 왕국’이었습니다. 문헌에서도 가야에서 철이 대량으로 산출됐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으며, 가야의 유적지에서는 철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철은 가야를 융성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야를 외부의 침략대상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가야는,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가야를 정복한 신라는 가야지역의 철광석 산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동시에 제철기술자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철제무기를 생산하였고, 이는 통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처음 가야를 정복하려 했던 백제를 제치고, 신라가 가야를 정복한 것은 백제의 방심을 틈탄 사소한 결과였지만,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던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고대사회에서 철은 국력의 상징인 동시에,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 요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철기문화
철 화살촉
철검(대도)
백제는 ‘철의 왕국’이라 불리던 가야보다 더 많은 제철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에 칠지도를 하사할 정도로 백제는 우수한 철기제작기술을 보유한 국가였습니다.
낙랑과 대방에 의해 한반도에 철기가 유입되었고, 3세기 무렵 마한 소국은 낙랑과 대방의 제철장인들을 흡수하여 철 생산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마한 지역들을 흡수하며 우수한 철 생산기술도 함께 흡수하였습니다. 진천 석장리 제철 유적과 충주 일대에 분포한 여러 제철 유적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근초고왕은 철제 무기와 농기구 제작에 힘썼고 이는 영토 확장과 경제력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백제에서 만든 철정은 당시 물물 교환의 기준으로써 화폐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비단, 활, 화살과 함께 40개의 철정을 왜왕에게 보냈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백제 칠지도 모조품(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제지역에서는 현재까지 4곳의 철 생산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중 진천 석장리 유적만이 전면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충주 칠금동과 청원 연제리 유적은 일부만 조사, 화성 기안리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중 유일하게 전면조사가 이루어진 진천 석장리 유적은 일종의 대단위 일관제철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과 백제시대 제철 유적의 발굴조사 등을 토대로 볼 때 백제는 우수한 철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도 석장리 제철로를 모델로 제철로의 높이, 구조 등을 복원하여 과거 백제가 고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철 문화 속에 숨겨진 과학과 문화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쇠의 나라'의 신라
철정(鐵鋌)
신라는 일찍부터 철의 나라로 내외에 이름을 드높인 쇠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쇠의 나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라의 전신인 진한(사로국)이 일찍부터 풍부한 철을 생산하여 남는 철을 동북아시아 전역에 수출하여 널리 공급한 철의 나라였다는 사실은 기원전 3세기에 편찬한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진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여 한, 예, 왜가 다 이를 사갔다.
모든 시장에서 철을 중국의 돈처럼 사용했고, 다른 2개의 군에도 공급했다.”
이보다 1세기 후에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 진한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여, 한, 예와 왜, 마한이 모두 이를 사갔다.
모든 무역에서 모두 쇠를 화폐로 사용했다.”
낫 (철겸, 鐵鎌)
쇠솥(鐵鍑)
신라에서 제일가는 철산은 울주군(울산광역시) 농소면 달천리에 위치한 달내(래)철광입니다. 이 철광은 근래까지도 채광이 이루어진 유명한 광산으로, 1970년대 초 포항제철소 건립 당시 소량이지만 이곳의 철광석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주로 자철광이 발견되었으며, 원료 확보가 용이한 신라시대 천혜의 철광산이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철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사도구, 생활도구 등 철의 사용 범위가 확대 되었고, 철기를 소유한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철기를 다루는 장인들은 신라 시대 신분제도인 ‘골품제’의 벽을 넘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기도 하는 등 철을 다루는 기술자는 우대받았습니다. 이처럼 국가 차원에서 제철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있던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종국에는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고려와 조선시대 철강업
철제석가모니불좌상
철조 석가불좌상
1. 고려시대 철강업
고려시대 초에는 국가 행정제도를 통하여 철 생산과 수요를 이전보다 세분화 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철소(鐵所)*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습니다.
* 철소 : 철 등 지방 특산물 확보를 위해 고려시대부터 운영한 특수행정구역
철 생산에는 많은 노동력과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산과 공납 관리는 해당 군현에서 담당하였으며, 철소에 거주하는 백성은 매년 국가에서 정해준 일정량의 철을 국가에 공납하였습니다.
고려시대 주요 철소 중 하나인 ‘다인 철소’는 대규모 철 생산지였으며, 다인철소와 관련된 기록은 <고려사> 등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 고종 42년(1255) 몽골군 침입 때 공을 세운 다인 철소를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한 내용과 원나라에 조공할 환도를 주조하게 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다인철소는 고려시대 국영종합제철소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고려시대 제철기술의 특징은 제련로의 평면 형태가 과거 원형 위주에서 타원형과 장병형 등으로 다양화 되었으며, 규모 역시 길이와 너비가 각각 200 ~ 300cm에 이를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이밖에도 슬래그를 배출하기 위한 배재구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송풍관의 경우 삼국시대와 같은 방식으로 2개의 송풍관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제철의 기본적인 원료인 철광석 대신 사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5년 발표된 <발해국지장편>에는 강이나 하천에서 철광물을 얻는 방법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사철 제련이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통형 로에서는 철광석을, 상자형 로에서는 사철과 토철 등 분말상태의 광석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처럼 제철로의 평면형태 및 규모 변화, 철광석 중심에서 사철을 이용했던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는 제철기술의 현격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주조로 생산한 철기 역시 괭이와 같은 농기구를 넘어 솥과 불상 등으로 다양화되었습니다. 특히 빨리 굳어버리는 철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정교한 철불상이 활발하게 제작된 고려시대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제철 및 공예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참고
고려와 조선은 유교 성리학이 국가이념이자 근본 질서였기 때문에 철을 생산하고 철기를 제작하는 장인은 신분의 열악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철기술과 관련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각 시대의 제철유적과 관련 문헌기록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유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 조선시대 철강업
대장간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檀園風俗圖帖)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철의 생산, 유통 등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의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관영수공업 중심의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승장(僧匠)들에 의한 사원수공업, 귀족들에 의한 사영(私營)수공업으로 다양화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이후에는 철소로 불리는 관영수공업과 민간수공업이 함께 발전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철물을 국가에 공급하는 공납(貢納) 체계로 변화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종래 부역노동에 기초한 봉건적 생산방식에서 임금노동에 기초한 초기자본주의적 성격으로 철 생산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에는 각종 농기구나 생활도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장간(단야장)에서는 야장(冶匠), 철장(鐵匠)이라고도 불리는‘대장장이’들이 호미나 낫과 같은 농기구나 쇠로 된 생활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대장간에는 쇠를 뜨겁게 달구는 단야로(화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대장장이들은 뜨겁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망치로 내려쳐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고, 찬물에 식혔다가 다시 뜨겁게 달궈 망치로 내리치는 작업을 반복하며 도구를 제작하였습니다. 단야작업은 무척 고된 일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대장장이가 각기 맡은 일을 나누어 진행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 에는 서울에 192명, 지방에 458명의 야장(대장장이)이 각 관서에 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에는 야장이 부족하여 군인과 포로로 잡은 왜인(倭人) 대장장이들을 사역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야장은 다시 유철장(鍮鐵匠), 주철장(鑄鐵匠), 수철장(水鐵匠)으로 나누고, 그 중 무쇠를 다루는 야장을 수철장이라고 불렀으며, 조선 후기에서는 대장장이라고 하면 수철장만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야장의 세분화로 인하여 조선의 금속가공기술이 발달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장장이 중에는 오로지 관청 수공업장에서만 사역당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스스로 농기구 등을 만들어 장시(場市)에 상품으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으로 생활하며 관청의 사역에 때때로 응하던 자들이 많았으며, 관청수공업이 붕괴되던 조선 후기에는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철의 생산과 유통은 전국적으로 매우 활발하였으며, 조사된 제철유적의 80% 이상이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철기술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철로의 구조이며, 조선시대의 제철로는 고려시대에 비해 구조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조선의 철산지 중 ‘합천 야로면 야철지’의 경우 앞선 시대와 동일하게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조성되어있는 반면, ‘김제 장흥리 은곡 제철유적’에서는 세장방형 평면 형태에 여러 개의 소구경 송풍관이 장착된 상자형 제철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충주 완오리, 보은 상판 제철유적과 같이 노 주위에 석재와 점토를 이용해 노벽을 보강한 시설도 확인되었습니다.
전통 제철로 조업 모습
조선시대 제철유적 (경주)
이와 같은 특징은 앞선 시기에는 등장하지 않던 구조로, 원료와 연료의 안정적인 공급과 체계적인 유통 등 제철조업에 있어 필요한 여건을 구비하여 현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조업이 반복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이후 석축형 제철로에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은 석축형 제철로가 유행하였습니다. 석축형 제철로는 반영구적인 사용이 가능하였으며 토철, 사철 등 분말상 원료를 주로 사용해 탄소과포화상태 분위기의 노에서 선철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 철강업은 제철기술의 발전 뿐 아니라 유통과 제도의 변화를 거치며 정착되었습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고려시대 이후 사용된 제철로와 제철방식은 서양의 방법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기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식 제철기술이 원활히 계승되지 못한 원인은 효율성 보다는 전란과 서구세력의 침입으로 등으로 인해 조업기술의 계승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참고
본 웹사이트의 게시물은 한국철강협회에서 2020년에 작성하였으며, 게시물에 활용된 사진자료는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에 따라 활용되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기시대, 대장간, 대장장이)
- 한국사 탐(探) - 백제의 철기 문화 (YTN)
- 재미있는 우리나라 철 이야기 (홍대한, 철강홍보위원회)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철과 함께하는 시간여행 (철강홍보위원회)
- 석축형제철로(石築型製鐵爐)의 조업방식 연구 (신경환, 김권일, 최영민)
- 고려와 조선시대 제철기술의 발달 (철강보, 한국 철강기술의 발전 역사 4)
- 조선시대 울산 쇠부리의 조업방식 (2014 울산 쇠부리축제 학술심포지움)